중앙유치원의 설립
중앙대학교의 역사는 1916년 10월 17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중앙교회에서 중앙유치원을 개원한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 중앙유치원 설립을 알리는 신문기사 (『매일신보』, 1916.10.11.)
우리 민족은 1910년 경술국치를 통해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강탈하며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에 대항해 무력항쟁과 애국계몽운동 등의 항일 운동을 펼쳐나갔다.
애국계몽운동은 우리 민족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일제와 맞서고자 한 것으로 교육구국운동, 언론결사운동, 경제자립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그 중 교육구국운동은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실력을 양성해 일제와 대항할 수 있는 정신적·물질적 능력을 키우고자 한 운동이었다.
일제 식민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는 1911년 1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해 초·중등학교 등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의 모국어 지위를 박탈하고 국어를 일본어로 정해 일본어 수업을 강요했다. 민족 선각자들은 유아교육기관인 유치원에는 일제의 모국어 사용 규제가 미치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해 우리말로 유아를 교육시킬 수 있는 유치원 설립에 뜻을 갖는 이들이 생겼다.
중앙대학교의 시발점이 된 중앙유치원은 이러한 교육구국운동, 민족교육이라는 역사적 소명 위에서 탄생했다. 더욱이 외국인 선교사가 주체가 돼 설립된 타 유치원들과 달리 중앙유치원은 순수 조선인의 힘으로 중앙교회라는 공간을 빌어 설립한 것이기에 더 큰 특징과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전문교육기관으로 발전하는 중앙
이처럼 “우리민족의 독립은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으로, 교육은 유치원을 통한 뿌리에서부터” 라는 유치원 교육운동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중앙유치원의 활동은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1922년에 유치원 규정을 만들어 이의 확산을 통제코자 하였으나 1924년 중앙유치원 이외에 서울에 수송·경성·태화유치원 등이 생겼고 개성과 평양에도 유치원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사회 환경으로 보아 학생 자체를 모집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중앙유치원에 사범과를 설치하여 여학생을 모집해 유치원교사를 양성한다는 것은 우리 근대 교육사에서도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졸업생을 계속 배출해 함흥·회령·부산·마산·전주·안악·천안·사리원·밀양 등지에 있는 유치원에 취직시키게 되었으니 중앙유치사범과는 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그 임무와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경영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어려웠지만 기성의 재력에 의존하지 않고 민족 속에서 자생 자립한다는 정신만은 항상 유지하고 있었다.
1922년에 이르러 이른바 일제의 대정 데모크라시운동이나 신간회의 사회교육 운동과 더불어 중앙유치사범과는 중앙보육학교로 승격되었다. 이 학교는 법령상으로는 3년제의 전문학교가 아닌 각종 학교였으나 사회 통념상으로는 전문학교 정도의 학교였다.
任永信 교장과 중앙의 꿈
승격 인가된 중앙보육학교의 운영은 여전히 어려웠다. 민족분열을 노리는 일제와 그 주구들의 농간, 그리고 운영자들의 재정적·개인적 사정이 겹쳐 1932년에는 학교를 개인집으로 옮겨야 했고, 학생 수도 10여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중앙보육학교를 1933년 당시 34세의 任永信 선생이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였다. 任 선생은 기전여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시 전주지방 만세시위를 주동했다가 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 후 일본 광도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불굴의 투지로 도미 유학을 하였다. 任 선생은 관동대지진 때에 일제가 한국인을 학살하는 사진을 당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李承晩 박사에게 전한 일화는 유명하거니와 미국에서 이미 M.A까지 획득해 한국의『쟌다크』가 되고자 결심한 당시의 『신여성』이었다.
任 선생은 1932년 1월 9년 만에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아직도 일제치하에 있는 우리 민족을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래서 선생이 처음 맡은 직책은 Y.W.C.A의 총무였고, 이 직책을 수행하고자 전국을 순회하면서 느낀 것은 민족을 구하는 일은 교육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선생은 미국에서 농장일·트럭운전·야채도매 등 온갖 고생을 하며 모은 돈 3만 달러를 투입 학교를 설립할 교지를 흑석동에 샀고,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한 것이다. 이제 중앙은 任永信 교장을 통하여 민족교육의 요람지로 성장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발전과 탄압의 시련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고 교지를 흑석동에 마련하였으나 교육장이 마땅치 않았다. 이에 任永信 교장은 피어선 성경학교를 빌어서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任교장 개인의 재정적 한계가 곧 닥쳐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일제는 여러 명목으로 기부금도 금지시켰으니 학교 운영상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이제 학교의 발전을 위해서는 미국에 가서 모금운동을 전개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任교장은 생각했다. 이리하여 任교장은 도미의 여비를 장만하여 미국에 가서 모금운동을 전개하였고, 드디어 미국에 중앙보육학교를 후원할 『파이퍼』재단을 설립하고 귀국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37년 4월부터는 흑석동에 석조 교사의 건축을 시작하여 1938년 5월에 『영신관』을 완성하고 이곳으로 학교를 이전하여 교육을 시작하니 오늘날의 대중앙의 터가 된 것이다.
그 후 흑석동에 있는 중앙보육학교는 우리나라 보육교육의 중심이 되어 유아교육의 이념을 연구하고 실천하여 나아가는 『신여성』들의 요람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조선보육학회도 창립하게 되었고, 학생들도 더욱 자부심을 갖고 음악회·연극회·문예활동을 통해서 사회교육을 담당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즈음에 일제는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41년에는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더불어 일제는 1940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하고, 1941년에 사상범 예비 구금령을, 1943년에는 징병제·징용령을 내리고 드디어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령을 공포하는 등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任교장이 미국에 유학했다는 점이나 기독교 신자라는 점에서 중앙보육학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하였다. 드디어 일본의 통신부대가 학교교사를 접수하려 들었으나 任교장의 용감하고 적극적인 항거로 이를 막았다. 그러나 2차 대전 말기 일제의 발악적인 탄압은 중앙보육학교에도 닥쳐와 1944년에는 결국 신입생을 모집할 수 없었고, 폐쇄를 당하게 되었다.
해방과 중앙의 역할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는 해방되었으나 조국에는 새로운 민주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등 많은 할 일을 남겨놓았다.
任永信 교장은 1945년 9월 28일에 중앙보육학교의 문을 열었고 『의에 죽고 참에 살자』라는 교훈과 교가도 제정하였다. 이제 중앙의 정신은 독립을 위한 실력양성이 아니라, 신생조국을 건설해 갈 인재를 양성하고 그들의 정신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중앙보육학교를 중앙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하고 개교식·입학식·개학식을 가졌다. 또 1946년 11월에는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을 설립하고 다음해 8월까지 법적 절차도 모두 마쳐서 학교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다시 1년 뒤인 1947년 4월에는 중앙여자대학으로 개편하고 다시 1948년 5월에는 남녀공학의 중앙대학으로 학칙을 변경함으로써 건국초기에 필요한 인재양성 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동안 중앙보육의 任永信 교장은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서 민주의원의 대표로 UN에 파견되어 UN으로부터 건국승인을 받은 등 외교활동을 벌이면서도 중앙대학의 학장과 재단의 이사장직을 수행해 학교의 발전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후 1950년 5월에 제1회 학사학위수여식을 가졌으나 6.25동란으로 인해서 무기 휴교, 9.28 수복 후에 학생의 재등록을 받다가 1.4후퇴로 학교의 모든 서류를 부산으로 옮기고 그곳에 중앙대학 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951년 4월에는 任永信 학장이 도미하여 미국에서 외교활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부산 송도의 『전시연합대학』이 아닌 중앙대학의 단독개강을 진행하였고, 이어서 이리와 서울에도 분교를 설치하여 강의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전란 중에도 한시도 교육을 중단하지 않은 것은 민족 교육기관으로서 중앙대학교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려는 것이었으며, 이런 결과로 전시 중인 1951년 2회, 52년에 3회, 53년에는 4회의 학사학위수여식을 부산에서 가지는 등 인재배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 하였다.
종합대학으로 승격
부산 피난 중에서도 교육을 중단하지 않았던 중앙대학은 1953년 2월에 드디어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그리하여 문리과대학, 법정대학, 경상대학, 약학대학 등 4개 대학 9개 학과 및 대학원을 설치하고, 총장에는 任永信박사가 취임하였다. 6.25동란도 휴전으로 들어가자, 그해 8월 교사도 부산에서 서울 흑석동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이 교사에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아직도 주둔하고 있어서 강의는 가교사에서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학기가 지난 1954년 4월에 이 교사를 미군으로부터 인수하여 학교를 재정비하였다.
그 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계속하여 학과를 증설, 4개 대학 19개학과 정원 2,850명의 규모로 대학이 성장했다. 이러한 학과의 증설과 학생의 증가에 부응해 1956년에 2,500여 평의 4층 건물인 파이퍼홀을 준공하였고, 1959년에는 건평 3,800여 평의 중앙도서관도 준공하여 개관하였다. 동시에 연구활동을 강화하기 위하여 국제문화연구소 등을 두었고, 또 교육의 체계화를 위해서 교과과정을 끊임없이 보완·수정하였으며, 교육의 계열화를 위해서 자매학교로서 낙양중·공업고등학교, 영신여자중학교, 영신중학교, 부속유치원 등을 두고 체계적인 교육을 할 수 있도록 교육사업도 확장하였다.
종합대학의 내실화
1960년에 4.19가 일어났고,『의와 참』으로 교육받은 본교 학생들은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였다. 또 1961년에는 5.16이 일어나 대학의 질적 향상을 위해 양적 팽창 억제정책을 폈다. 이를 맞아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61년 10월 2대 총장에 任星熙 박사가 취임 하였으나 1963년 5월 任永信 박사가 다시 3대 총장에 취임, 대학의 내실화를 계속 다져 나갔다.
1965년 1월에는 문리과대학을 분리하여 문과대학, 이공대학, 사범대학으로 개편하고 법정대학, 경상대학, 약학대학을 합하여 6개 대학으로 증설했다. 또한 자매 중·고교를 사범대학 부속중·고교로 개칭하고 부속국민학교를 설치하여 부속유치원과 함께 한 재단 아래에서 같은 교육이념 아래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일관된 교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전문직업인을 배출하여 학교와 사회의 연계성을 넓혀가기 위하여 1967년 2월에 사회개발대학원을 설치하였다. 1968년에는 계열화에 의한 교육체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과대학, 이공대학, 사범대학, 법과대학, 정경대학, 경영대학, 농과대학, 약학대학 등 8개 단과대학으로 증설 개편하였으며, 1971년 12월에는 의과대학을 설치하고 대학부속병원으로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성심병원을 흡수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을 이루었고 그 내실화를 기하였다.
이러한 대학조직의 확장에 발맞추어 여건 조성도 함께 진행되었다. 1961년 7월에는 건평 1,400여평의 진선관과 1,920평의 대학극장이 준공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건평 1,600여평의 사회과학관을 준공하여 교육장을 확충했다. 그리고 1968년 개교 50주년을 맞아 교사를 정리하여 대학의 역사적 사명을 재음미하였고, 이러한 역사의식에서 당시의 문서, 필적들을 100년 후에까지 안전하게 보관ㆍ전달될 수 있는 청룡상을 건립하였다. 이때 승당관도 건립하였고, 다음해인 1969년 12월에 3,200평의 봅스트홀을 준공하여 새로 흡수한 1,396평의 부속성심병원과 함께 교육의 내실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미래에 대한 포석
이즈음에 중앙대학교의 창설자인 任永信 박사는 이미 고희를 넘긴 노령이었고, 총장 으로서의 격무를 감당하기에는 체력이 견디기 어려웠다. 이에 任永信 총장은 중앙대학교를 자신의 뜻을 이어받아 세계적 대학으로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여긴 任哲淳 박사로 하여금 총장에 취임케 하였다.
이때에는 국제교류가 점점 빈번해지고 사회도 다양화 되어가고 있어서 이러한 시대환경에 부응할 수 있도록 대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따라서 기초학문의 발전 없이 응용학문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이공대학을 분리하여 공과대학을 설치하고 문과대학에 자연과학의 기초분야를 합쳐서 문리과대학을 두게 하였다. 예술분야를 위해서 1972년 6월에 기존의 학교법인인 서라벌예술학원이 운영하던 서라벌예술대학을 합병하였으며, 1974년에는 이를 예술대학으로 개편하였다. 또 2부 대학을 1978년에 병설하였고, 1979년 1월에는 국제경영대학원과 교육대학원을 설치하여 학교가 전문 직업인의 수준을 높이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미래를 예상하고 대비하는 대학으로서 그 시설의 확충도 또한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1972년 10월에 진선관을 증축하여 3,100여평의 서라벌홀을 준공하였고, 1974년에는 2,400여평의 의과대학 교사인 자연관을 준공하였다. 또 1976년 12월에는 2,000평의 학생회관을 준공했으며, 1978년 6월에는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의과대학 부속성심병원의 신관 1,450평을 준공하였다.
그러나 1977년 2월에는 정치·외교 및 교육계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특히 중앙대학교를 세우고 발전시켜 왔던 承堂 任永信 박사가 서거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세계수준의 대학으로 도약 발전하려는 계획에 따라 안성캠퍼스도 건설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1980년 3월에 경기도 안성에 2,417평의 제1차 교사동과 1,706평의 제2차 기숙사 및 597평의 제1차 학생회관을 준공하였다.
제2캠퍼스의 건설과 확장의 시련기
1980년 5월에 任哲淳 총장은 임기가 만료되어 그 후임으로 문리대 철학과 교수인 李奭熙 박사가 제5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1980년 11월에 신문방송대학원을 설치하여 직업 언론인의 전문교육을 학교가 담당하게 하였고, 12월에는 필동에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별관 1,100평을 준공하여 의과대학의 교육여건도 개선시켰다.
이처럼 서울지역의 학교시설을 계속 확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안성의 교육기구 확충에 힘을 기울였다. 1981년 10월 안성교사를 외국어대학, 사회과학대학 및 가정대학 등 3개 대학으로 개편하였고, 1982년 3월부터는 서울에 있는 교육장을 제1캠퍼스로 안성에 있는 교육장을 제2캠퍼스로 명명하여 서울지역과 안성지역의 균형적 발전을 꾀하기 시작했다.
다시 1982년 10월에는 예술대학에 있는 음악학과를 음악대학으로 확대 발전시켰고, 1983년 9월에는 농과대학을 산업대학으로 명칭 변경하고, 건설대학원도 두었다. 1984년 10월 안성에 있는 제2캠퍼스에 건설대학을 설치하여 제2캠퍼스에 7대 단과대학의 규모를 가지게 하였다.
이러한 제2캠퍼스의 기구개편과 대학증설에 따라 교육시설도 속속 확장하였다. 1980년 12월 안성교사에 2,866평의 제2차교사동을 준공했고, 대운동장 5,400평을 1981년 4월에 완공했다. 또 1981년 6월에는 3,270평의 제2차 교사동을 준공하였으며 다시 10월에 558평의 제2차 학생회관을 준공하였다. 이어 1982년 11월에 636평의 교수연구동 및 626평의 농과대학 실험동을, 12월에는 4,874평의 예술대학 건물을 준공하였다. 계속해서 1983년 8월에는 음악대학 강의동 1,192평과 강당동 714평 및 야외 수영실습장 423평을 준공하였고, 9월에는 655평의 체육관도 준공하였다. 또 1984년 12월에는 음악대학 증축건물 1,145평과 제3차 교사동 5,068평을 준공하여 현대적 캠퍼스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제2캠퍼스에 대한 이러한 계속적인 시설투자는 학교재정에 무리를 가져와 적지않은 문제들이 노정되기에 이르렀다. 제2캠퍼스에 대한 무리한 교육시설 확충사업은 재단의 부채를 가중시킨 데다 학교법인 산하 사업체의 부실경영이 겹쳐 그로인한 재정적 어려움은 대학운영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李奭熙 총장 후임으로 1985년 3월, 文炳鏶 박사가 제6대 총장에 취임 하였다.
문병집 총장은 대학운영의 합리화를 기하기 위하여 운영체제개편에 착수하였다. 기획업무를 비롯, 예산 및 재무행정체제를 개편하고 대학운영에 관한 각종 규정을 정비 하여 행정체계의 제도화와 합리화를 위한 작업을 추진하는 한편, 교학담당 부총장제와 사무담당 부총장제를 도입하고 취업지도과를 신설하였으며 중앙문화연구원과 의료원의 운영체제를 개편하였다.
그리고 폐과된 문과대학 불어불문학과와 일어일문학과를 복과시키고 산업정보학과를 신설하였으며, 제2캠퍼스에 현대적인 중앙도서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누적된 학교재단의 부채는 재단의 존립을 어렵게 하였으며 대학의 운영에도 많은 어려움을 가져왔다.
金熙秀 이사장의 취임과 새로운 전기 마련
대학을 경영하는 법인의 재정적 난관은 극복되지 못한 채, 1987년에 이르러서는 학교 법인과 학교법인 산하 기업체의 부채규모가 700억원에 달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법인의 이러한 재정적 어려움은 사실로 나타나 법인은 이 재정적 위기를 극복할 능력을 상실하였고, 대학구성원들인 학생, 교직원, 동문들도 구교의 방안인 부채변제의 방안을 제시할 수가 없었다. 다시 국내의 유수한 기업인들에게 학교법인의 경영을 맡아 줄 것을 교섭하기도 하였으나, 이 막대한 부채액과 이로 인하여 일어날 수 있는 기업 내의 반발 등을 고려하여 아무도 나서지를 못하였다.
이때에 재일교포 실업가인 金熙秀 박사가 학교법인을 책임지기로 하고 새로운 이사진을 구성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경남 창원출신으로 13세이던 1937년에 일본에 맨손으로 건너가서 東京電氣大를 졸업하고 일본굴지의 기업인『金井』을 이룩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일제의 민족차별 환경하에서 공부하였고, 기업을 이룩하고 발전시키면서 많은 민족적 비애를 경험하였다. 동시에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애국심을 불태워오다 민족의 영원한 독립은 교육을 통하여 양성한 인재들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해 일본에서도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본국에서 본격적으로 고등교육사업을 책임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재일교포 실업가로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동안 재일교포로서 국내에 기업을 창업하여 성공한 사례는 있으나, 교육사업에 참여한 것은 첫 사례가 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金熙秀 박사의 법인 이사장 취임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김희수 이사장은 학교경영의 책임을 짐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혼란을 사전에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우선 법인이 교직원, 학생, 동문은 물론 국내의 유수한 기업인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부채를 지고 있다는 점도 그렇고, 한국사회의 일반적 관행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空手來 空手去』라는 인생철학을 갖고 있었다. 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룩해 모은 재산은 민족을 위해 보람 있게 사용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일 가운데 교육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바로 국가와 민족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일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학교법인의 운용책임을 맡은 것이었다. 그는 이사장에 취임하자마자 즉시 법인이 갖고 있었던 모든 부채를 청산하였으며, 새로운 총장에 李在澈 박사를 영입하여 학교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한편 으로는 제1캠퍼스에는 교수연구실과 법과대학건물을 증축 또는 신축하였고, 제2캠퍼스에는 도서관을 완공하였으며, 기숙사와 학생회관의 건설을 추진하여 새로운 발전의 활력을 불어넣어 갔다.
동시에 1989년부터는 문리과대학을 문과, 이과대학으로 분리시키고, 신문방송학과에서 광고·홍보분야를 분리하여 광고홍보학과를 설치하였다. 또 제2캠퍼스에는 노어학과와 생물공학과를 설치하였으며, 행정대학원과 산업기술경영대학원을 설치하는 교세의 확장을 착실히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민주화의 부산물과 대학의 혼란
이 무렵 사회는 대통령간선제를 강행하려는 정부의 정책에 끊임없이 반대하였던 재야세력 및 대학생들의 요구와 교수들의 서명운동 등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고, 학원자율화의 조치들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영향은 즉시 대학사회에도 미쳐 학교운영의 민주화와 대학발전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각종 요구들이 쏟아졌다. 그 가운데 가장 커다란 요구는 메디컬 캠퍼스(M.C)의 건립이었다. 학생들은 이를 위하여 본관을 점거하면서 요구하였다. 또 대학원생들은 대학원 단독건물을 요구하며 본관을 점거하는 등 크고 작은 요구를 하면서 시위 혹은 점거를 통하여 요구사항을 관철하려 하였다. 金熙秀 이사장이 취임한 후 법인은 현 흑석동 캠퍼스의 부지가 좁아서 충분한 시설을 할 수 없음을 고려, 강남구 개포동에 대단위 부지를 마련하고자 계약을 체결하고 장기 발전계획 구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라는 미명에 편승한『양심의소리투쟁위원회』라는 유령단체가 나타나 온갖 허위 자료를 만들어서 이를 내ㆍ외에 유포시켰고, 일부학생들은 여기에 편승해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급기야는 국회에서조차 이 문제를 거론함에 따라 대단위 부지를 구입하여 학교를 발전시키고자하는 법인의 구상은 수정을 하게 되었다.
교육철학 실현을 위한 제 포석
사회의 민주화운동은 대학 내에서도 전시대의 유물인 권위주의가 상당히 사라지게 하였고, 교수협의회, 대학노동조합의 설립 등 구성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게 하는 등 긍정적 토대도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 다양한 의견이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 혹은 집단 이기주의적 발상에서 출발된 경우도 있어 대학의 발전을 위한 진정한 의견으로 수렴하기에는 다소 미흡한 측면이 있어서 대학에서 장기적인 발전방향을 제시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과정에서 李在澈 총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퇴임하였고, 1989년 2월에 대학역사상 처음으로 교직원들의 투표과정을 거쳐서 河璟根 박사가 제8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이때 직원들의 근무조건을 개선하고자 주 5일근무제를 도입하였고, 우수한 인재를 유치하려는 목적 아래 신입생을 전후기로 분할하여 모집하도록 하였다. 한편 제1캠퍼스와 제2캠퍼스의 균형발전을 위하여 제2캠퍼스에 교무처와 학생처, 그리고 총무처를 두었고, 어학원과 국제협력부를 통합하여 국제교육처를 신설하였다.
1991년 2월, 학교법인의 명칭을『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에서『학교법인 중앙대학교』로 변경하였고, 제1캠퍼스에는 슈퍼컴퓨터를 도입하여 전산센터를 건설하였고, 법과대학과 경영대학 강의동을 신축하였으며, 대학원 건물도 신축하였다. 그리고 제2캠퍼스에는 생활관과 건설대학, 산업대학, 교수숙소 등을 추가로 신축하여 교육여건을 개선하였다. 그러나 1991년 10월 교육부의 증원·증과 과정에서 정보산업대학원을 신설하였음에도 불구하고『공과대학의 교육여건이 타 대학과 비교하여 하위급』으로 평가한 결과와 관련하여 학내소요가 크게 일어났다. 이에 1992년 3월 각 분야별 전공교수를 중심으로『대학발전계획수립전문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장단기 대학발전계획 수립에 착수하였으며, 4월에는 학내 구성집단별 대표들이 모여『대학발전공동협의회』를 결성하고 법인과 총동창회의 회장단을 참여시킨 가운데 대학의 안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였다.
한편 법인은 이사회를 통해 학내사태의 원만한 수습을 기하고자 1992년 6월, 金玟河 박사를 총장직무대행에 임명하고 河璟根 총장의 잔여 임기동안 총장직을 대행토록 하였다. 金玟河 총장직무대행은 취임즉시『중앙가족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통하여 전중앙가족의 상호신뢰 회복을 통해 대학의 안정과 발전의 기틀을 다지자는 호소와 함께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제시하였으며, 대학발전공동협의회와 더불어 문제를 하나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그 가운데 대학은 차츰 안정과 질서를 회복해 갔으며, 특히 대학발전공동협의회 참가주체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노력으로 1992년 10월, 잠실종합운동장에서 2만여 중앙가족이 운집한 가운데『’92축전 범중앙인한마당』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중앙인의 단합된 모습과 발전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하였다. 더불어 교육시설 확충사업도 지속되어 예술대학 증축, 의과대학 부속필동병원 증축이 이루어졌고 이과대학 건물 신축이 추진되었다. 1993년 2월에는 교수, 직원, 학생 등 대학내 구성원들의 총장후보 선출방식에 대한 의견수렴을 통해『총장후보정책발표회』와 교직원들의 총장후보 선거과정을 거쳐 金玟河 박사가 제9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金玟河 총장은 개교이래 최대 위기로까지 불리웠던 학내 분규상황을 원만히 극복하는 역량을 과시함과 동시에 중앙의 오랜 전통으로 축적된 중앙가족의 지혜와 역량을 바탕으로『민족대학』 『민주대학』 『선진대학』 『건강하고 새로운 대학문화의 창조』라는 미래지향적인 대학의 4대 육성지표를 제시하고 이의 실천을 선언하였다. 1994년 11월 의약품 및 식품관련분야 전문인력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의약식품관리 대학원을 설립하였고, 1995년 3월에는 이과대학 건물인 수림과학관을 준공하였고, 4월에는 지하 1층 지상 6층 150여명 수용규모의 제1캠퍼스 여학생기숙사를 완공하였다. 또한 8월에는 공학계열의 대외 경쟁력 확보를 위하여 현 봅스트홀을 증축하였으며, 12월에는 전산센터를 증축하였다.
1995년 10월에 물리·화·생물·수학과를 자연과학부로, 기계공·기계설계학과를 기계공학부로, 전기공·전자공·제어계측공학과를 전기전자제어공학부로, 경영대학의 경영·무역·회계학과를 경영학부로, 사회과학대학의 경영·무역·회계학과를 상경학부로 하는 학부제를 단행하였으며, 이과대학을 자연과학대학으로, 산업기술경영대학원을 산업경영대학원으로 대학과 대학원의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예술대학원도 신설하였다. 1996년 1월에 제2캠퍼스의 상징인 교문을 신축하였고, 10월에는 제1캠퍼스 학생복지관과 제2캠퍼스 본관을 신축하였고, 1996년 10월에는 약학과와 위생제약학과를 약학부로, 의예과와 의학과를 의학부로, 토목공학과와 도시공학과를 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로 학과 통합을 하였으며, 교육부의 대학원 입학정원제의 변경방침에 따라 입학 총정원제에서 연도별 입학정원제로의 변경과 함께 의약식품관리대학원을 의약식품대학원으로 대학원의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국제전문인력양성 국책대학원으로 국제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97년 2월에 제10대 총장으로 李鍾 교수가 취임하였다. 이 총장은 대학이 본래 가지고 있는 교육과 연구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자는『신르네상스운동』을 전개 하였다.
1998년 3월 제2캠퍼스에 사회체육교육을 목표로 한 체육과학대학을 신설하였으며, 가정대학을 생활과학대학으로, 10월에 산업대학을 산업과학대학으로 대학의 명칭을 변경하였고, 1999년 11월 정부의『두뇌한국21(Brain Korea 21)사업』계획에 따라 첨단영상전문대학원을 신설하여 이 분야의 특성화에 기여함으로써 교육부에서 시행하는『교육개혁추진 우수대학 재정지원 사업』에 5년 연속 최우수대학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또한 대학의 교육과 연구환경 개선을 위하여 부속고등학교와 부속유치원을 이전·개교 하였으며, 본관의 정보통신문화관의 개관과 제2캠퍼스 대학교회·오수종합처리장을 신축·준공하였고, 문화예술의 요람지인 중앙문화예술관을 개관하였고, 중앙대학교의 귀중한 사료가 될『중앙대학교 80년사』도 발간하였다.
한편 김희수 이사장의 취임시 1천병상 규모의 의과대학 부속병원(MEDICAL CENTER)을 신축하겠다는 약속의 이행이 지연되자 의과대학 재학생과 수련의 및 전공의가 이 약속의 이르게 되었다. 다행히 부속고등학교가 강남구 도곡동으로 이전·개교함으로써 신축할 부속병원행을 촉구하는 농성과 함께 수업거부와 파업으로 유급의 위기까지 가는 급박한 상황까지 이 부지가 마련되고, 1997년 10월에는 이 자리에 부속병원 착공을 법인과 대학이 함께 약속하고 의과대학생은 이 약속을 수용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새로운 중앙 건설을 위한 장ㆍ단기 종합발전계획「DRAGON 2018」수립 및 MBO 방식에 의한 수행
새 천년의 시작과 함께 2001년 2월에 제11대 총장으로 朴命洙 교수가 취임하였다. 취임과 더불어 『변화와 발전을 통한 새로운 중앙의 창조』 를 위하여 『새로운 비전』 과 『새로운 문화』 및 『새로운 행동』 을 강령으로 제시하고, 종전과 다른 개념의 대학발전계획인 「DRAGON2018」 을 수립하였다.
「DRAGON 2018」 은 중앙대학교를 상징하는 청룡과 개교 100주년이 되는 2018년을 합성하여 만든 용어로 이 계획은 21세기 교육환경 변화에 적극 부응하면서 교육ㆍ연구ㆍ학습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자 개교 100주년까지 달성해야 할 목표와 지표를 설정해 2002년 10월부터 체계적으로 집행하고 있는 중앙대학교 장ㆍ단기 종합발전계획이다. 이는 종전의 발전계획과는 달리 실현이 가능한 구체적 계획이고, 급변하는 환경에 적절히 대응해 계획을 수정ㆍ보완할 수 있도록 한 신축적인 계획임과 동시에 정량목표를 연단위로 설정해 달성여부를 확인하면서 수행하는 MBO 방식 추진계획으로써 학교법인, 학교, 교수협의회, 직원노동조합, 학생회, 동창회 등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여 수립한 다음, 수없는 수정과 보완을 거쳐 확정해 2002년 10월 11일 개교기념일에 대내ㆍ외에 공포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함에 따라 학교가 역동적인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맨 먼저 개교 이래 80여 년간 사용하여왔던 마크체계의 학교 상징물들을 디지털시대에 부응하는 대학이미지체계로 통합하는 작업(UI사업)을 수행하였다. 이에 녹색의 교색을 청색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교체, 교표, 교기 등 학교의 이미지를 전면 새롭게 창조하였다. 더불어 폐쇄형 교문을 철거하고 상징 조형물로 대체하여 담장 없는 열린 캠퍼스를 대학 최초 실현하였다.
이와 함께 2000년 2월 국악대학, 2002년 12월 국악교육대학원, 2004년 9월 창업경영 대학원을 신설하게 되었으며, 「Dragon 2018」 ‘중앙인’ 양성의 핵심사업으로 ‘선도특성화’, ‘중앙팀’ 육성의 핵심사업으로 ‘전략특성화’사업을 추진하였고, 더불어 ‘중앙터’ 조성의 핵심사업으로 제1캠퍼스에 1만 8천여 평의 메디컬 캠퍼스 신축, 6천여 평의 교수연구동 및 체육관 신축, 1만여 평의 복합건물신축(대학극장 재개발), 제2캠퍼스에 3천여 평의 국악대학 신축, 2천여 평의 생활관 신축, 7백여 평의 선수숙소와 원룸을 각각 신축하는 등 학교의 비전과 전략, 교육과 연구제도, 행정수행 방식 및 시설여건 등 모든 분야의 제도와 여건이 종전과 다르게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확충되었다. 이러한 결과 학교가 새로운 모습으로 급변하게 되었으며, 중앙가족도 종전과 다르게 모교에 관심을 갖는 통합의 계기가 조성되었다. 발전기금 기부실적도 5년간 총 380억원이라는 역대 최고의 실적을 기록하게 되었다.
또한, 제11대 총장 재임 시의 대학경영 실적을 담아 백서의 형태로서 대학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소상히 보고하여 주어진 책무를 다함은 물론, 그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여 대학발전의 계기로 삼고자 "제11대 총장 대학백서(2001~2004)”를 발행하였다. 이 백서의 발간은 지난 4년간의 기록을 넘어 2018년 개교 100년사의 4년을 준비한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제11대 총장단의 대학종합 발전계획인 "DRAGON 2018”과 주요 경영실적을 중심으로 한 자료를 편찬하는데 중점을 두었으며, 대학운영 전반에 대한 설명과 이를 통한 성과를 통계, 현황표 중심으로 기술하고 추진과정에서의 문제점과 개선이 필요한 분야 등을 언급하여 대학발전을 위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이 백서는 "DRAGON 2018" 의 추진과정과 성과, 단과대학 중심 경영체제 운영을 평가한 학(원)장보고서(Dean's Report) 실적, 특성화 추진 실적, 교수·직원·학생들의 활동상황, 재임기간 4년간 총장의 주요활동 등을 담고 있어서 2018년 개교 100주년으로 가는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어 중앙대학교의 귀중한 사료로써 인정받고 있다.
“창조와 화합”으로 개교 100주년을 향한 준비
2005년 2월에 제12대 총장으로 박범훈 박사가 취임하였다. 박범훈 총장은 “창조와 화합”의 새로운 중앙을 건설하고자 “세계적 수준의 지식창조 및 학습역량 보유대학”으로의 발전을 위한 7대 공약을 제시하고 선거 첫 과제인 대교협 평가, 수도권 특성화, BK21, 법학전문대학원 유치 등 4대 국가사업의 성공적 유치를 총장 프로젝트로 관장하여 비교적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최대 현안 과제인 교육과학기술부 구조개혁 선도대학으로 선정되어 1년의 유예기간에도 불구하고 주요 경쟁대학과 대등한 재정지원(91억원)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는 1캠퍼스와 2캠퍼스에 중복되어 있는 유사학과와 2개 대학의 통합 등을 통해 대규모 구조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입학정원의 산술적 감축이 아니라 문화예술과 과학기술을 융합하는 내용의 특성화 전략이었다. 또한 학부 구조조정에 이어 3개 전문 대학원 및 11개 특수대학원의 신입생 충원 및 재학생 등록현황, 재정 상황 등 총체적인 운영현황을 분석하여 각 대학원별 운영상 문제점의 개선 및 교육품질의 향상을 도모하고자 전문 및 특수 대학원에서 총 42명을 감원하여 일반대학원에 32명을 증원하고 10명은 구조 개혁 선도대학 특성화 사업에 의한 대학원 전체정원에서 감원하였다. 일반대학원에 증원된 인원은‘연구우수집단(교수) 우선전형’등을 통해 연구중심대학 체제 구축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하게 하였다.
11대 총장단의 개교 100주년 대학 청사진인 「DRAGON 2018」 (2001-2004)을 「CAU 2018」 (2005-2008)로 명칭 변경하여 2018년 개교 100주년을 준비하고 있다. 「CAU 2018」 은 각종 사업에 대한 평가 지표와 재원확보가 구체적으로 마련되어 있어 안에서 보다 밖에서 더 높게 평가 받는 계획으로 2018년 개교 100주년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Y-10주년 기념사업으로 「CAU 2018」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2단계 실천중심도약 단계로 추진하고 있다.
박범훈 총장 취임 후 4년간 교육·연구 기자재 등 교육환경개선사업을 위해 집중 투자하여 2007년 2월 국내 최대 규모의 법학관이 완공되었고 1캠퍼스의 정문 주변에 약대 및 자연계열 R&D센터와 대운동장 주변 공학계열 R&D센터를 건립하기 위한 마스터플랜을 마련 하였다. 2008년 법학관에 미디어실습동 완공,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400병상 증축 등 「CAU 2018」 발전계획의 중앙터 조성계획에 따라 ‘최적의 교육 및 연구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2007년 11월에는 하남시와 ‘하남캠퍼스’추진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였다. 하남캠퍼스는 약 8만 6천여평인 미 공군 공여지인 ‘캠프콜번’에 추진하고 있으며 분야별 사업 추진단을 구성 운영하여 우리 대학의 미래 비전에 도전하고 있다. 이러한 계획적이고 지속적인 「중앙터」 조성사업으로 우리 대학은 연구개발의 중심이 되는 것을 넘어 연구중심대학으로 가는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또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244명의 전임교원을 초빙하였으며, 2009학년도 1학기에는 전임교원과 별정제 외국인 교원을 포함 총 25명의 교원을 초빙하여 대학의 연구력 증진 및 획기적인 교육연구환경 개선이 예상되고 있다. 법학전문대학원 및 경영전문대학원, 의학전문대학원 등 전문대학원 체제를 구축하여 세계적 수준의 지식 창조 및 학습역량 보유대학으로 연구중심대학을 육성하고 있다. 2009년 3월 법학전문대학원, 의학전문대학원을 개원함으로써 기존의 국제대학원, 첨단영상대학원, 경영전문대학원과 더불어 급변하는 사회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시대적 추세에 선도대학으로서 도약의 계기가 되고 있다.
박범훈 총장 취임이후 4년간 총 400억원의 발전기금과 외부연구비 수주액 1,663억원, 그리고 정부재정 지원 사업으로 확정된 국고지원액 총 173억 등 우리대학 역사상 가장 많은 금액인 2,216억원의 재정을 확충하였다. 그리고 국내 대학최초로 성과중심 연봉제 인사제도를 도입하고 교수의 승진 및 승급 심사기준을 강화하는 승진, 재임용 제도개선으로 연구경쟁력에 있어서는 세계 명문대학에 진입하기 위한 글로벌 지표를 설정하여 추진하고 있다.
중앙대 ‘한국의 중심’을 넘어 세계로
2008년 5월 글로벌 기업인 두산그룹을 새로운 학교법인으로 영입하여 박용성이사장이 제9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두산그룹의 체질을 소비재에서 중공업 중심으로 변화시킨 박용성이사장의 취임은 과거의 중앙대가 사라지고 새로운 중앙대가 탄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취임 후 80여일 지난 2008년 8월 27일 전체교수회의를 통해 「CAU2018+」중장기 발전계획을 발표하면서 ‘선택과 집중, 실행력 강화, 선순환 구조 확립’이라는 새로운 전략방향을 제시하였고 내부 구성원들의 변화로 대학의 발전비전을 달성하기 위하여 국내 대학 최초의 100% 연봉제를 도입하였다. 이것은 철저하게 능력과 성과에 따라 임금을 결정해 교수진의 잠재 역량을 끌어올린다는 취지였다. 교직원의 임금제도도 호봉제에서 연봉제로 전환시켰으며 행정조직도 개편해 외부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학생들도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도록 학사관리제도를 강화하였으며, 졸업을 하려면 일정수준의 영어실력과 회계학 등 신설된 필수 과목을 이수하도록 하여 ‘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대학’으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연구와 교육, 학습을 보다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약학대학과 자연계열 종합 R&D센터 신축, 기숙사 신축, 중앙도서관의 리모델링, 300병상 규모의 병원증축 공사 등 법인의 자금력과 실행력을 통해 그동안 꿈으로만 간직했던 계획들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연구프로젝트 지원에도 연구경쟁력강화특별위원회를 신설하여 전략적으로 육성할 분야를 선정하고 집중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벌써 2단계 BK21 사업에 6개의 사업단이 새롭게 지정되는 등 성과가 나오고 있으며 60억원의 예산을 배정하여 선도연구단을 지원함으로써 ‘선택과 집중’에 의한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
또한 ‘실행력 강화’를 위해 총장 직선제를 폐지하고 임명제로 바꾸고 제12대 총장인 박범훈 박사를 제13대 총장으로 연임을 시켰다. 이는 가장 중요한 변화의 시기에 총장선거로 인한 소모적인 에너지를 업무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한 이사장의 강력한 의지였다. 박범훈 총장과 학교법인이 가장 큰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 하남캠퍼스 건립이다. 2007년 하남시와 양해각서(MOU)를 맺고 하남캠퍼스 조성을 준비하고 있다. IT, BT, CT 등 첨단연구과제를 중심으로한 연구중심캠퍼스, 친환경적인 그린캠퍼스를 조성한다는 계획으로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박범훈 총장이 가장 적임자이기 때문이다.
90년 동안 쌓아 온 전통의 명문 우리 중앙대학교는 글로벌 기업 두산그룹과 함께 이제 ‘한국의 중심’을 넘어 ‘세계가 선호하는 명문대학’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목표로 힘찬 날개 짓을 하고 있다.
세계적 수준의 지식창조 및 학습역량 보유대학을 만들기 위한 ‘중앙’의 노력
제9대 박용성 이사장은 취임 후 ‘인재를 중시하는 두산그룹의 철학’을 ‘인재를 육성하는 중앙대학교’에 접목시키고자 제일 먼저 교수와 직원을 두산중공업이 있는 창원으로 초청해 진지한 대화와 토론을 벌였다. ‘창원세션’이라 불리는 이 자리를 통해 중앙대학교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상호 소통’을 통해 설정하고자 하였다.
대학발전의 청사진인『CAU2018+』중장기 발전전략은 2008년 8월 27일 전체교수회의를 통해 발표되어 개교 100주년이 되는 2018년에 국내 5대, 세계 100대 대학 진입한다는 목표를 제시하였고, 중앙대학교의 전 구성원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내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고 있다.
『CAU2018+』 중장기 발전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2010년 대학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학문단위 및 행정조직 재편성을 단행하였다. 18개 단과대학으로 방만하게 운영되던 학문단위를 10개 단과대학으로 슬림화하고 이를 인문사회, 경영경제, 자연공학, 의약학, 예체능계열의 5개 계열로 재편성하여 미래에 최적화된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행정조직 역시 대학본부의 의사결정에 따라 운영되던 이전의 조직구조에서 탈피하여 계열부총장이 예산, 교원의 임용 및 인사, 교육 및 연구 지원 기능의 전권을 가지면서 계열별 행정 시스템을 총괄하는 형태로 변화시켜 계열 간의 경쟁을 유도하고 대외경쟁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계열부총장을 중심으로 교원 및 학생들에게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는 계열별 교학행정실을 두고 이를 뒷받침하는 대학본부의 기획관리본부, 총장직속기구로 재편되었다.
변화를 위한 중앙대학교의 노력은 벌써부터 결실을 보이고 있다. 2008년 국내 대학 최초로 도입하였던 ‘업적평가와 연계한 교원 연봉제’는 도입 첫 해 시행결과, S등급 28명(3.6%), A등급 175명(22.2%), B등급 536명(68%), C등급 49명(6.2%)로 나뉘었고, S등급과 C등급의 급여차이가 6.6%로 성과에 따라 차등적인 연봉인상율이 적용되면서 ‘국제학술지에 게재된 교수 1인당 논문 건수’가 32% 증가해 시행 초기부터 긍정적인 변화를 보였다. 특히, 이 평가결과는 온라인 커뮤니티 ‘중앙인’에 공개되어 전 구성원이 결과를 알 수 있게 하였고, 그 중 S등급자 28명의 명단을 공개하여 연봉제 도입이 성과에 대한 공정한 보상방법이며, 기존 연공서열에 의한 호봉제 보다 대학발전에 더욱 긍정적인 방법임을 입증하였다.
새롭게 학교 경영에 참여한 제9대 박용성 이사장의 전폭적인 지지와 더불어 중앙대학교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학생 1인당 교육비는 2007년 대비 77% 증가된 1,406만원을 기록하였고, 법인전입금은 2007년 대비 무려 1,274% 증가된 847억을 기록하여 국내 대학 중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또한, 교원들의 SCI논문 게재수는 2007년 대비 98%이 증가된 715편을 기록하였고, 기술이전수입은 2007년 대비 267%가 증가한 18억을 기록하였다. 150억이 투입된 중앙도서관 개축, 370억이 투입된 15층 규모의 기숙사 신축, 500여억원이 투입된 최첨단 R&D센터의 개관은 중앙대학교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할 것이다.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는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먼저 인식되어, 2010년 대학 입시에서는 5,077명 모집에 85,032명이 지원하여 2010년 대학입시에서는 5077명 모집에85,032명이 지원, 2008년 8.6:1 2009년 12:1의 경쟁률과 대비 급 상승한 2010년17.2:1이라는 사상최대의 입시경쟁률을 기록하였다.
‘2018년 세계가 선호하는 명문대학’이 되기 위한 중앙대학교의 노력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학문단위재조정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2010년 2월, 인천시와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하남캠퍼스 건립과는 별도로 인천 검단 신도시에 새로운 캠퍼스를 구축을 추진 중에 있다. 인천과 하남 두 곳에 모두 캠퍼스가 들어서면 중앙대는 서울캠퍼스를 중심으로 동과 서를 지하철 등 단일 교통망으로 연결하는 멀티 캠퍼스 체제를 갖추게 된다. 중앙대학교의 개혁은 대학발전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우수한 인재를 입학시키고, 이들에게 우수한 교육서비스를 제공하여 사회로 진출시키고, 이들이 모교에 공헌해 다시 학교가 발전하는 선순환 구조를 확립하는 것이 중앙대학교가 만들고자 하는 대학의 발전 모델이다. 중앙대학교는 ‘상호 소통’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만들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세계적 수준의 지식창조 및 학습역량 보유대학으로 발돋움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
대대적인 교육 인프라 구축과 100주년을 준비하여 새로운 중앙의 New-Vision을 설계하다
2011년 3월, 제13대 안국신 총장이 취임하였다. 안국신 총장 이후 중앙대는 두산의 투자지원을 받아 본격적으로 교육인프라를 확충해 나가기 시작했다.
2011년 5월에 102관(약학대학및R&D센터)가 준공되었으며 101관(영신관) 앞에 중앙잔디광장을 조성하였다. 102관은 서울캠퍼스의 랜드마크 건물로 자리잡았으며, 연면적 38,360㎡(약12,000평)에 지하4층, 지상11층 규모로 준공되었다. 이 건물에는 약학대학 교수연구실, 실험실 및 강의실 그리고 연구개발시설과 각종 편의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2011년 8월에는 서울캠퍼스와 안성캠퍼스간의 중복학과를 정리하고 본·분교 통합이 이루어졌다. 안성캠퍼스 내 외국어 및 상경계열이 서울캠퍼스로 통합, 이전되었다.
2011년 11월에는 학교법인 중앙대학교와 학교법인 적십자학원간에 합병이 이루어졌다. 2012년 3월, 중앙대 의과대학 간호학과와 구)적십자간호대학을 통합하여 중앙대학교 적십자간호대학으로 신설하였다.
2012년 7월에는 (구)승당관 건물이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퓨처하우스”로 명명되었다. 퓨처하우스는 주로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을 위한 기숙공간으로 건립되었으며 지하3층, 지상 7층 규모의 건물로 총 80실에 159명이 생활할 수 있다.
2013년 3월에는 제14대 이용구 총장이 취임하였다. 또한 건강간호대학원이 신설되어 50명의 신입생을 선발하였다. 이용구총장 재임기간 중 중앙대는 2013년 산학협력선도대학 육성사업(LINC사업), 2014년 대학ICT연구센터 지원사업, 고교정상화기여대학 최우수대학선정, 학부교육선도대학육성사업(ACE사업), 수도권대학 특성화사업(CK사업) 등에 선정되는 성과를 이루었다.
2015년 2월, 309관(2차기숙사)가 완공되어 1,2차 기숙사를 합하여 총 2,33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게 되어 서울캠퍼스 학부 및 대학원들의 주거 안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2015년 4월에 제10대 김철수 이사장이 취임하였다. 2015년 8월에는 ‘100주년기념사업단’을 출범시켜 2018년 개교 100주년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2016년 2월에는 제11대 박용현 이사장이 취임하였다. 3월에는 김창수 총장이 제15대 중앙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김창수 총장은 취임사에서 ‘기본에 충실한 대학, 구성원이 행복한 대학’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며, 학교 운영시스템을 선진화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6년 8월, 중앙대학교의 또 다른 랜드마크인 100주년기념관(310관)이 준공되었다. 310관은 지하6층, 지상12층, 총75,058㎡(약 2만2,704평) 규모로 국내 단일대학 건물 중 최대 연면적을 자랑하고 있다. 310관에는 경영경제대학, 공과대학, 창의ICT공과대학의 교수연구실과 강의실이 위치하고 있으며 다양한 편의시설이 입주하였다. 10월에는 1층 로비에 건학 100주년을 기념하는 조형물 ‘History Wall(작품명: Flash 100)’이 설치되어 310관내 명소로 꼽히고 있다.
중앙대는 최근 각종 대·내외 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보였는데, 2016년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 역대 최고성적인 종합 7위에 올랐으며, 2016년 QS 세계대학평가에서는 386위로 상승하면서 300위권에 최초 진입하였고, 2017년 THE 아시아 대학평가에서 10계단이 상승한 종합 60위에 올라 각종 평가에서 최고의 성과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중앙대는 2017년 2월 KOICA가 지원하는 ‘도시개발정책 역량강화 석사학위연수(SP) 용역사업’에 선정되어 대학원 석사과정으로 ‘도시개발·정책학과’를 신설하고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총 60명의 인재를 배출할 계획이다. 더불어 2017년 3월 미래창조과학부가 지원하는 ‘SW중심대학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4년간 66억원의 지원을 받아 창의ICT공과대학을 중심으로 ‘4차 산업혁명시대’에 대비하여 신설전공을 설치하고 창의적인 미래인재 육성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2018년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중앙대는 세계가 선호하는 명문대학으로 발전하기 위한 중앙의 새로운 ‘New Vision 2030’ 수립에 착수하여 대학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있다.
중앙대학교는 2017년 3월 현재 1개 일반대학원, 4개 전문대학원, 12개의 특수대학원과 13개 단과대학에 49개 학과를 둔 대규모 종합대학으로 그동안 학사 191,592명, 석사 21,170명, 박사 5,541명을 배출하였다.